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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 꽃보다 남자 등을 보다, 한국에 오니 하나 티브이만 틀어도 "수준높은" 영화감상이 가능해졌다. 오늘은 아침밥상 차리며 Once를 다시 보는데 것 참, 다시 봐도 행복한 영활쎄, 므흣. 점심때는 짱깨 시켜먹으며 수면의 과학을. 요것, 다시 봐도 여전히 귀여운 영활쎄.
놈놈놈을 보았다. 남편도 나도 좀 지겨워서 하품을 해댔다. 때깔 좀 곱다, 남자 셋 나온다, 말고는 정말 할 말이 없는 영화를 만들어놓고 김지운은 버젓이 광고에 등장한다. 30년대 만주가 내 전공은 아니지만, 그래도 역사 한 자락을 붙잡고 연구하는 사람으로써 감독의 나이브함에 좀 쇼크먹었다. 정우성과 이병헌의 머리카락만 다르게 연출하는 것이 영화적 센스의 전부는 아니란 말이다. 김지운은 한편으론 그런 방면에 소질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적어도 저 영화의 배경을 30년대 만주로 해놨으면 개론서, 아니 만주 관련 글 한편 정도는 읽어봐야하지 않았을까 싶다. 역사 의식 등을 영화에 깔기 위해서가 아니라, 김지운의 영화적 센스가 30년대 만주와 스쳐가는 지점들이 분명히 있을거라는 기대 때문이다. 논문 한편만 읽어봤더라도, 저렇게 단선적인 영화를 자신있게 내놓지 않았을것이다. 끔찍할만큼 재미있는 구석이 많은 "만주"라는 공간을 걍 "똥색 벌판"으로 만들어놓다니. 딴 넘도 아니고 김지운이. 그걸 잘했다고 박수쳐주는 깐느도 참.
배우에 대해서도 할 얘기 많다. 그나마 자기 결 잘 유지하고 간 사람은 이병헌인 것 같고. 송강호는 딱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니메에나 나오는 캐릭터가 되었다. 불쌍한 배우. 더 이상 할말 없음. 그리고 정우성. 이 영화에서 덕을 보긴 했으나 오마쥬/패러디로 가려면 좀 더 확실하게 가야했다. 결국은 이도 저도 아닌 캐릭터로 끝나고 말았다.
개인적으로 김지운과 좀 안다면, 프론트나 니뽄에서 표상된 만주를 보여주고 싶다. 하다못해 나토리 요노스케의 사진 한장만 봤어도, 남자 셋을 데리고 저기까지 가서 저런 영화를 찍어오진 않았을텐데. 것도 중견 감독으로서.
한국에 왔다 ^^
세상에서 가장 덥고 깨끗하고 건조하고 붐비고 미래적이고 멜랑꼬리한 도쿄의 여름을 뒤로 하고 왔다. 사실 그런 도쿄의 여름을 꽤나 좋아하는 편이라 마음 한구석은 약간 시리다.
가족이 있는 곳에 돌아왔다. 그것이 뭐라 말할 수 없는 정서적 안정을 주기는 한다. 이곳에서 앞으로 5일, 다시 마구잡이 흥청망청 도시인 몬트리올로 돌아가게 되었다.
동경-서울-몬트리올의 삼각형의 그 어딘가, 그러나 그 아무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디아스포라가 어느덧 삶의 형식이 되어버렸다. 사람들과 반쯤 소통하고 반쯤 문닫고, "내 자신은 내 자신일뿐"의 에고로 살아내지 않으면 살아가기 힘든 이 생활. In the middle of nowhere.
지금은 이런 삶의 모드가 최상이라고 해두자. 그러나 앞으로는?
영화 꽃보다 남자를 보러간 것 ㅋㅋ
일본 물가가 하도 비싸서 영화관도 못갔었는데, 얼마전 롯본기 모리타워에 있는 영화관에선 학생 할인을 대거 해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연달아 세개를 보고야 말았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벼랑 위 뽀뇨, 내 여친은 사이보그, 꽃보다 남자. 그래, 나 정말 영화 고팠다. 흑.
여친은 사이보그는, 친구가 그걸보고 무슨 영화평을 써야한대서 할수없이 봐준거고, 보고나니까 참 맘이 허해서, 그래, 뽀뇨나 보고 동심으로 돌아가자, 라는 맘에. 그런데 뽀뇨를 보고 끝내기엔 참 계몽적인 하루라서, 에라 썅, 모르겠다 싶어서 내지른게 꽃보다 남자. 결과적으로 마음은 더 허해졌지만 -_-;;
친구는 날더러 꽃보다 남자류를 좋아한다며 경멸하는 눈빛을 감추지 못했고, 나는 내 여친은 사이보그를 보고 몰 쓸거냐고 (포스트 휴먼 이딴거?) 빈정거렸다. 나도 일본서 참, 취향이 이상해진건지, 허벅지가 한줌도 안되는 남자것들이 멋져보인다니까. 요즘은 아라시에 푸욱 빠졌다. 에그. 쟤네들 다들 몸무게 50킬로대에, 키는 170안되고,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 쟤네들이 드라마에서 성질을 있는대로 다 부리는걸 보면서도 왜 좋아뵈는지. 진짜 취향 이상해졌다. 마츠쥰의 희안한 얼굴이 어찌 그리 멋져 보이는지. 이거 혹시 모성애?
그런데 일본영화 세개를 보고나니 뭐랄까... 마치 소화불량에 걸린 느낌? 밥대신 단것만 잔뜩 먹고 났을때 그 느낌이랄까. 물론 단것의 종류는 다양했지만, 아무튼 왜 그렇게 얘네들은 많이 미안해하고 고마워하고 또 다짐하고 소망하고 그러는걸까. 결국 뭔가 속이 미식거리는 기분으로 돌아와, 잽싸게 류승완 영화를 봤다. 그러니까 난 쌈마이 영화가 그리웠던거다. 한국의 그 알싸하고 매캐한 공기가 그립다. 몸에 디지게 안좋겠지만, 그 찌푸둥한 하늘밑에서 아이스 라떼하나 들고 여기, 저기, 활보하고 싶다. 그게 지금 나의 가장 뚜렷한 소망.
가장 맘이 잘 맞고 의지가 되는건 역시 "사진사"를 어떤 식으로든 연구하고 있는 친구들, 그들이 운영(!)하는 연구회에 참석하게 되어 간만에 좋아하는 사진 싫어하는 사진, 미술사가들의 사진보는 방식의 문제점, 미디어 이론가들의 문제점들에 대해 수다떨며, 지극히 "문화자원"적 관심으로 프린트 기법과 인쇄 기법, 톤, 디테일 들을 이야기하다보니, 오오.... 생각해보니 이게 얼마만의 일인지. 한국의 사진하는 사람들과 소식이 끊어진지 오래. 경민 오빠를 빼면 단 한명과도 연락을 하지 않았기에, 최근에 어떤 작업들이 성행하고, 또 누가 모마에서 전시를 하는지조차 따라가지 못했다.
나를 꼬셔 사진연구회에 데불고 간 토다 마사코, 지금 속해있는 학교, 같은과 박사과정 재학중이다. 1930년대 일본의 신흥사진을 연구하고 있다. 박사논문 제목은 "호리노 마사오와 보도사진의 시대" 라고 한다. 나이도 나랑 엇비슷, 결혼하고 1살 반된 딸도 있다. 매일 딸을 유모차에 태우고 동대 보육원에 맡긴 후, 9시-5시까지 연구실에서 강의 준비를 한다. (무사비에서 사진사 강의중) 석사때부터 주욱 사진사를 해온터라, 내가 아는 일본/서양사진의 지식의 10배정도는 풍부한 모노가타리 꾸러미를 가지고 있다.
얼마전 토다 마사코에게 너 결혼 왜 했냐는 질문을 했다. 그랬더니 너무도 명쾌한 그녀의 대답 "연구자가 되기 위해서" "음... 보통은 사랑때문에 했다던가, 뭐 그런말을 하지 ㅋㅋㅋ" "난 원래 결혼 안할려고 했거든.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 근데 곰곰히 생각해봤지.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서는 연구자가 되어서 생계를 연명 못 할 것 같더라고. 그래도 둘이면 어떻게든 연명되거든. 아내로서의 역할? 후미짱 (딸) 낳으면서 그건 다 했다고 생각해"
토다 마사코랑은 좀 오래, 깊이 친구가 될 것 같다. 왠지 느낌이 그렇다. 비슷한 연구를 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함께 공부하려고 하는 공동체 의식도 일본인으로선 참 남다른 것 같고, 일본사진에 대한 고민, 더 넓게는 사진 자체에 대한 고민도 진지하고 알차다. 그녀의 고민에는 오랜 역사가 있다. 나만큼이라 오래된 사진에 대한 그 뭐라 말할 수 없는 애증과, 채워지지 않는 호기심과 그런것들. 일본서 오죠사마들을 하도 많이 봐서 그런지, 연구자가 되려고 결혼했다는 대답또한 깍쟁이가 아닌 솔직담백한 아줌마의 고백으로 들려서 정겨웠다.
곧 마사코의 책이 나온다. 내가 10월에 돌아오면 출판파티를 하기로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본사진계 사람들과의 모든 인맥이 모두 마사코를 통해서 만들어졌다. 누가 알았겠나. 내가 동경도사진미술관의 수석 큐레이터와 진솔하게 사진이야기를 나누게 될지. 이이자와 고타로나 가네코 류이치와 말을 트게 될지. 자신이 가진 여러가지 소스들은 남에게 오픈할줄 아는 것, 또 남이 가진 소스로부터 배울 줄 아는 것, 둘다 프로정신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 같다. 마사코는 그런 점에서 참 프로답다.
그 밖에, 이 인연이 좀 오래 가 주었으면... 하는 친구들이 몇 있다. 전시기 지정학을 연구하는 유이치, 메이지시기 보도문화와 환등기를 연구하는 오오쿠보, 19세기 프랑스의 기록사진 연구하는 사오리짱, 그리고 신체/미디어이론으로 박사논문을 다 쓰고도 졸업을 안하고 있는 타케시군, 이들에게 고마움은 산처럼 불어가고, 그것을 표현할 길은 오직, 내 논문의 끝장을 보아, acknowledgement에 한줄 한줄 감사의 글을 남기는 것 뿐. 그래서 1년이 지나면, 나도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어기 어디 시골 모처에서 직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혹시라도 여기 오실일이 있으시면 꼭 연락주세요" 라는 단체메일을 뿌리게 될까.
밤 11시 반, 시부야. 이자까야에서 1, 2차가 끝난 후, 3차 가라오케를 갈까 말까 약간 망설이는 나 나: 일본에 와서 가라오케 가 본 적 한번도 없어요 지도교수: 음. 그럼 가보는게 좋지 않나? 좋은 경험이걸랑 나: 음... 다른 지도교수들은 보통 학회 등에서 발표 할때 "좋은 경험"이라고 하지요 지도교수: 음. 그래서 더 좋지 않나? 마음이 넓은 지도교수를 만나서. 지도교수가 노래부를때 완전 하이톤으로 엔카, 댄스곡 (주로 여자 듀엣), 만화 주제가 등을 고루 섭렵한다는 말을 익히 들은터라 일생에 한번 찾아올까 말까 할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결국 1시반이 되어 파장, 시부야에서 심야 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을 걸어서 돌아와야했다. 그래도 므흣 - Now I know how high he can go 거의 김종국과 맞먹으시더구만. 어찌나 하이톤이던지, 내 참 기죽어서. 이어지는 내용
결국 최남선 챕터를 다 빼기로 하고, 다시 방향을 잡은 두번째 챕터. 어쩌면 이 논문에서는 식민지 이야기를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식민지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의지는 북미라는 장소성에서 비롯된 것 같다. 그 권력의 파노라마를 흥미롭게 들어줄 관객은 북미 아카데미아 밖에 없다는 생각에, 신이 나서 그렇게 떠들어왔는지 모르겠다.
그 챕터를 빼버리고 나니 이 논문은 겨우 시각성과 미디어, 사진, 공간의 이야기, 그러니까 내가 5년전 한국에서 관심이 있었던 딱 바로 그 지점으로 돌아왔다. 해리 하루투니언이나 사카이 나오키와 거리를 두다보니, 조나단 크래리와 탐 거닝, 그리고 핼 포스터등의 이름들 사이를 다시 서성거리게 되었다. 그러나 조금은 다른 담론적 공간에서 - 일본이라는 - 조금 다른 문법으로.
2,3장을 시각과 주체론으로 잡아가면서 "사생하는 주체"라는 개념을 정교화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메이지 30년대의 강박관념은 결국, 사실, 사의, 사진, 사생, 등의 전통적 개념들을 어떻게 근대화시키는가에 있었다. 그 와중에 타카하시 유이치와 요코하마 맛사부로는 미디어의 독자성을 폐기시키고, "사실"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토대 위에 회화와 사진 사이에서 자유롭게 놀고 있었다. 그것은 지구 사진의 역사상 가장 행복한 사진과 회화의 결합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그들의 행복은 짧았다. 사진은 곧 사진으로, 회화는 곧 회화로, 서로의 갈 길을 가야하는 시기가 두 차례의 전쟁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미디어의 독자성의 확립,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생하는 주체"의 개념은 사진과 회화, 그리고 회화 내부에서도 일본화와 양화, 심지어 문학의 세계에마저 드넓게 걸쳐져 있었다.
"사생하는 주체"가 재미있는 것은, 스스로가 근대적 주체를 표방함에도 불구하고, 에도의 표상 시스템을 개념적으로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생하는 주체는 크래리식의 19세기형 관찰자인가, 아니면 데카르트적 관찰자인가? 이 질문은 결국 메이지 일본의 보는 주체가 (사생하는 주체) 푸코의 고전-근대의 구조틀과 어떻게 결부되어 있는가(혹은 있지 않은가)에 대한 해명을 요구한다.
앞으로 계속.
Philippe Lacoue‐Labarthe, Typology Giorgio Agamben, Potentialities
시작하기도 전부터 이미 화제에 올랐던 2분기 드라마, 체인지. 기무라 타쿠야, 후카츠 에리를 투 탑으로 내세우고, 아베 히로시 같은 쟁쟁한 조연으로 바닥부터 차곡차곡 깔아주던 "정치" 드라마. 1부가 끝나면서 소학교 선생이었던 기무타쿠가 여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더니, 2회가 끝나면서 바로 여당 당대표, 그리고 바로 내각 총리까지 만들어버리는 박진감 넘치는 줄거리. 정치경험 전무한 73년생 어리버리 이케멘이 일본의 총리가 되는 이 드라마의 줄거리는, 참으로 일본적 대사로 처리된다 - "니가 니뽄의 역사를 바꾸는거야"
여러가지 우여곡적을 겪음에도 불구, 기무타쿠의 타고난 선함과 솔직함, 설득력 ("그 사람은 어떤 "단어"를 가지고 있어요.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단어요" - 후카츠 에리), 젊음과 미모로 난제들을 하나둘씩 해결해가더니, 결국 정치계의 스테레오타입(보다 좀 더 간악한)이자, 자신을 내각 총리 후보로 밀어준 칸바야시 선생의 함정에 걸려들며, 50일만에 내각은 끝이나고.
여기까지만 해도 역시 정치 드라마의 한계는 어쩔 수 없다, 도대체 저 내각 총리는 기쿠타쿠라는 배우가 없었으면 누가 할 수 있을까, 뭐 그런 생각으로 껄렁껄렁 봐왔는데, 이럴쑤가... 마지막회에서의 반전 - 반전이라고까지 할 수 없는, 어쩌면 처음부터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 을 보고 이 드라마를 정치드라마로 생각해왔던 드라마 내공에 반성. 오, 이거 정말 기묘한 결말인걸. 어떻게 저렇게 처음으로 돌아갈수가. 처음과 똑같을수가.
아마도 기무타쿠가 내각 총리가 아닌, 오무라이스집 주방장이나 야구 선수로 나왔더라도 같은 이야기였을 것이다. 최선을 다하는 인생에 누가 돌을 던지리. 그러나 그것이 최선이었다고 하더라도, 필요악이 존재하는 세상을 만들고 싶지는 않다,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고민하는 나는, 비록 일본의 역사를 만드는 젊은 총리라 하더라도, 그저 이 세계에 깔려있는 수많은 돌맹이의 한조각에 불과할뿐. 그래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겠노라. 거기서 최선을 다하면 희망이 보이지 않겠냐, 하는.
그러니 기무타쿠가 첫선거에서 내질렀던 구호, "저의 손, 저의 다리, 저의 머리, 저의 모든 것은 여러분과 동일합니다 (僕の全てはみなさんと同じです!)"는 정치가의 신념이라기보다, 난 그냥 이 세상 돌맹이에 불과해, 라는 일본인의 주제파악(과 더불어 가장 큰 프라이드기도 한)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따지고보면 바로 그래서 이 드라마의 인기가 치솟았던 것 같기도 하다. 일본 드라마에선, 특히 기무타쿠가 나오는 드라마의 교훈은 바로 그 돌맹이의 인생에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늘 열심히, 프라이드를 지키며, 악발이처럼 산다. 잠도 안자고, 잘 먹지도 않고, 하루가 48시간이라도 모자란 바쁜 일상을.
그래서 이런 구조가 좋은가. 글쎄,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드라마"가 없는 드라마는 결말을 걱정하지 않으므로 우선 편안한 모드로 시청할 수 있다. 적어도 한국 드라마의 용두사미식 설정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그러나 이런 식의 일본 드라마는 처음부터 어떤 모랄을 설정해 놓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끈질기에 모랄을 전달하고야 만다. 그것이 빤한 구조속에서 보이므로 무척 유치해지기도 한다. 왜, 줄거리를 설명하면 졸라 유치한데 막상 보면 그럴 듯 해보이는 것들 - 토너먼트, 선악의 대결, 모험과 로망, 보이스카웃적인 의협과 로망, 일본적 센서빌러티 등으로 엮여진 아, 지극히 전형적인 일본적 내러티브. 글쎄 다 안다고. 벌써 수십편을 봐왔는걸. 그런데도 또 속아넘어간다니까. 아니, 저... 저런. 저럴수가. 저렇게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처!음!으로 돌아가는 저런 결말을? 스스로 물음표를 찍으면서 결국에야 깨닫고야 만다. 결국 드라마의 목적은 스스로에게 물음표를 찍게 하는 거였구나. 기무타쿠가 정치를 하든, 카레를 만들든, 스모를 하던간에 그이는 그저 내 대신 빡세게 물음표를 찍으며 사는 사람이란걸.
젠장. 그래서 내 발 또 내가 한번 찍는다. 또 당했군. 물음표의 잠잠한 압박에. 도대체 이렇게 물음표를 찍어주는 드라마가 시청률 30프로에 육박하다니, 너무 얄밉고도 잔인한거 아닌가? 개인적으론 기무타쿠와 후카츠 에리가 근 10년만에 투탑으로 나왔다는 사실에 좀 기뻤다. 후카츠 에리, 많이 늙었는데도 여전히 밝고 낭랑하구나. 특히 그 똑부러지는 일본어 발음...... 진짜 닮고 싶구만. 그리고 기무타쿠는 30이 넘어가더니 연기발이 늘었다. 이런 역만 계속해서일지도 모르겠는데, 또 이런 드라마는 그이가 아니면 어떻게 재생산되는가 심히 걱정되기도 한다.
달콤한 나의 도시보면서는 3배 정도 재밌었는데, 이상하지... 쓰고 싶은 말이 하나도 없어. 최강희 옷 넘 이쁘다... 친구들 술마시는거 넘 부럽다...이 정도? 이미 그 시간을 지나와서인지, 아니면 드라마 자체의 문제인건지.
지난주 목요일부터 이번주 화요일까지 하이델베르그에 다녀왔다. 이렇게 베풀어주는 학회는 처음. 뱅기표, 호텔, 밥까지 두둑히 얻어먹고도 모자라, 공항에 라이드까지 나와주었던 하이델베르그 대학 관계자분들께 감사를.
3박 4일간 발표와 질의, 토론을 주고 받고 나니, 돌아올 무렵 식구처럼 친해져있던 각지의 동료들. 페이스북이 있으니 전세계 어디서든 이어질 수 있겠지. 모두 재밌고 좋은 연구 계속 해주길, 영차!
그나저나 옥포에서(Oxford)에서 온 학생들, SOAS에서 온 학생들이 반을 넘어서, 영국 내 동아시아 미술사의 흐름을 조금 알게되었다. 그중엔 일본 공주도 있었다. 이 친구는 정말 명함에 Princess라고 써있더라. 흠. 뭐 공주도 직책이긴 하지. 사실 공주라기보다 여왕인데 (서열로는 쇼와 텐노 뻘이니까), 여왕님도 바나나 리퍼블릭 입고 그러시더라 ㅋ
복잡했던 머리를 씻어주고, 똘똘한 동료들, 교수들 틈에서 양질의 에네르기를 받아올 수 있었던 좋은 학회였다. 아마 박사과정 4년동안 참여했던 학회중 가장 기억에 남을 학회가 아닌가 싶다. 북미의 학회에 가면 늘 사람들 사이에서 부벼대며 그넘의 네트워크!를 만드느라 신경이 곤두서곤 하는데, 유럽중심의 학회여서 그런가, 그넘의 네트워크보다는 정말 순전히 발표와 토론 자체에 집중할 수 있었던 드문 기회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세상에 이렇게 재미나고 좋은 연구를 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게되었으니 (것도 전부 박사과정생인데) 지적 자극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다 커버가 되고도 남지.
그런데 일본에 주욱 있어서 몰랐는데, 그곳을 벗어나니 몸과 맘이 얼마나 편하던지. 눈치 안보고 마구 다리도 뻣고 말도 막하고, 먹으면서 마구 돌아댕기고, 썬글라스도 마구 낄 수 있고. 휴... 그러다보니 또 몽헤얄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르겠다. 이 분산의 다이어그램을 어떻게 설명하리. 몽헤얄, 유럽, 미국, 일본, 한국을 가로지르는 나의 정체성이란 참.
이어지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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